An Interview with Ko Un
2012.1, Anseong


On Beauty
My statement that “all abstraction is unrepayably indebted to the concrete” relates to the meaning of beauty. Before meaning beautiful, beauty is a debt that can be paid back to neither the things that are beautiful nor those that can be beautiful. Beauty is new. It also has more to do with death than with life’s beginning. However, the meaning of beauty can only hover behind beauty itself.
Pervasive philosophizing, that is contemplating on beauty, may have produced aesthetics which is both petty and skewed. Mothers don’t always give birth to an excellent child. Even before aesthetics came into being, there were more than a basketfull of definitions on beauty. Heaped upon for thousands of years, such definitions are besieging us regardless of their validity or invalidity.
Since things are as they are, I don’t want to repeat the crime of defining the concept yet again. My immature answer, therefore, to the question of what is beauty is that I want you to make a choice depending on your day-to-day subjective view. Or, the answer may come from the fact that any one definition would morph itself into another, like a life form, depending on the direction of the wind. Such a miracle would be coincidental.

Market, the adversity of beauty.

Beauty is not solid but liquid. It is neither an institution nor power. It is freedom. It is flight. When beauty gets locked up in a celestial realm and doesn’t know the hunger, persecution, or alienation on the earth; and when it is congealed within the aesthetic circumstances of being a close neighbor to all sorts of injustice and violence; beauty loses its own meaning. Therefore, beauty should eventually produce a mode of practice. It is because beauty cannot defend itself on its own, but rather, it is named by circumstances from the east, west, north, and south of the world.

On the Spirit of the Age
The spirit of the age, or zeitgeist, is born from discord with the age. It is never given beforehand. It is because all ideas are illegitimate children born from the continuation of reality. Therefore, zeitgeist can often be a delusion if it is separated from the material moves of the time. The will of fish swimming upstream against the current sets itself free from the instinct of the flow.
However, when zeitgeist settles comfortably only within its own time, in other words, when it doesn’t connect with unfamiliar premonitions from other times, it begins to decay. This is why I say that the boundary of zeitgeist extends up to the transcendence of the age.
As a single cell-like survivor who waded through the contemporary history of Korea, I was at the scene of all sorts of irrationalities and dreams. I was with things such as colonialism, breakup of the country, dictatorship, bloodshed, democracy earned by blood, despair, and fathomless potentials. Experiences like these all the more make me turn down a form of zeitgeist which is safe.
Since the time when ancient people named the age after the cycles of day and night, the ages have kept themselves up with the zeitgeist that refused to make anyone’s projects mundane. I have also inherited such a refusal. Zeitgeist essentially cannot be a spirit without grief of the human beings themselves. Because I live a different life from a poet who lived in ancient times, I live within the bounds of my own time. Yet at the same time, because my passion is no different from the passion held by a poet in Ancient Egypt four thousand years ago, I remove the bounds of my time. Universality is a dimension of time or age before it is a dimension of spatiality. I grasp the age I belong to with particularity, and encounter history with universality. Therefore, the age I live in wants to go beyond the unitariness of zeitgeist. In sum, I want
to go beyond living the contemporary history of Korea, and rather expand the longitudinal history of the world into my own historical space. This is because I don’t want to be suffocated. Only the time of liberation can liberate time.
Alas, what blissful virginity and a thing in desperate need zeitgeist is! Yet at the same time, what a stifling gorge de- serving disdain it is!





고은 시인 인터뷰
2012.1, 안성


아름다움에 관하여

모든 추상은 구상으로부터 갚을 길 없는 은혜를 입는다는 내 발언은 아름다움의 의미에도 닿아 있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라는 의미 이전에 아름다운 것과 아름다울 수 있는 것들에게 갚지 못할 빚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은 새롭다. 또한 아름다움은 삶의 시작 이상으로 죽음에 닿아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대한 의미는 아름다움 자체의 뒤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에 대한 성찰이라는 오지랖 넓은 철학 행위가 도리어 옹졸하고 편협한 미학을 낳았는지 모른다. 엄마는 뛰어난 아이만을 낳으란 법이 없다. 이런 미학 이전부터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定義)들은 한 소쿠리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많다. 그것들이 몇 천 년 동안 쌓였던 것들이 무효에도 유효에도 구애 받지 않고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나는 이런 판에 또 하나의 정의(定義)의 누범(累犯)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 대한 철부지 대답은 많은 정의 중의 하나를 그날그날의 주관에 따라 채택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아니, 어떤 한 정의조차도 풍향(風向)에 따라 전혀 다른 정의로 변신하는 생명체로서의 대답이 거기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그 기적은 우연이다.

시장(市場)이여, 아름다움의 고난이여

아름다움이란 고체(固體)가 아니라 액체이다. 제도와 권력이 아니다. 자유이다. 비상(飛翔)이다. 아름다움이 천상의 아름다움에 갇혀서 지상의 굶주림이나 박해와 소외를 모를 때, 그것이 온갖 불의와 폭력의 이웃이라는 미적 상황으로 굳어져 있을 때 아름다움 자체의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끝내 하나의 실천의 양식을 낳아야 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저 혼자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동서남북으로부터 그때마다 명명(命名)되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에 관하여

시대정신은 시대와의 불화(不和)로부터 태어난다. 그것이 먼저 주어지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관념은 현실의 지속에서 생겨나는 사생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대정신은 시대의 물질적 동작을 떠나서는 하나의 환각이기 십상이다.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의 의지가 비로소 흐름의 본능을 벗어난다.
하지만 시대정신이 시대 안에만 안주할 때, 다시 말하면 다른 시대에의 낯선 예감과 맞닿아 있지 않을 때 그것은 썩기 시작한다. 내가 시대에의 초월까지가 시대정신의 범주임을 말하는 이유이다.

나는 한국현대사 속을 헤엄쳐 온 한 단세포적 생존자로서 온갖 부조리와 꿈의 현장에 있었다. 식민지와 분단과 독재와 피와 피의 민주주의와 절망과 한없는 가능성 따위와 함께 있었다. 이 같은 체험이 도리어 나에게 하나의 안전한 시대정신을 사절하게 만든다.
고대인들이 낮과 밤의 주기(週期)를 시대라고 명명한 이래 시대야 말로 누구의 프로젝트가 일상화되는 것을 거부하는 시대정신으로 지속해 왔다. 나 역시 그런 거부를 이어받고 있다. 시대의 그것만이 아니라 시대정신이란 본질적으로 인간 자신의 비애 없이는 정신일 수 없다. 나는 고대 후기의 어느 시인과는 다른 삶을 산다는 이유로 내 시대의 한계 안에 살고 있다. 또한 내 열정이 4천 년 전 이집트 고왕조(古王祖) 시대 어느 시인의 열정과 다를 바 없는 이유로 내 시대의 한계를 지워버린다. 보편성이란 장소의 차원에 앞서 시간 또는 시대의 차원이다. 나는 특수성으로 내 시대를 깨닫고 보편성으로 역사를 만난다. 그러므로 내 시대는 시대정신의 단일성을 뛰어넘고자 한다. 요컨대 나는 한국 현대사를 사는 것 이상으로 통사(通史)로서의 세계사적인 삶을 내 역사 공간으로 확장하고자 한다. 숨 막히기 싫기 때문이다. 해방의 시간만이 시간을 해방시킨다.
아 시대정신이야말로 얼마나 황홀한 처녀성이며 절실한 것인가. 그러나 시대정신이야말로 얼마나 경멸 받아 마땅한 답답한 골짜기인가.